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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있다

2020-10-06

취향이라는 게 공고해져 가는 게 좋기도 하면서 동시에 괴롭기도 하다. 설렁설렁 아무거나 좋아하며 살면 맘이 더 편할까? 취향이 생기는 게 괴로운 이유는 1. 향유하기 위한 소비가 뒤따르기 때문이고 2. 취향이 찰떡같이 일치하는 상황보다 그 반대 상황이 언제나 더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경계가 또렷해지고 그 옛날 내가 느꼈던 감정의 정체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부끄러움과 치욕의 차이라든가 절망과 분노의 미묘한 다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도 왜 좋은지 모르면서 그냥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과할 정도로 내 감정을 분석하고 파악하고자 하는 경향이 생겼다. 긍정적인 경험을 했다면 또다시 느끼는 행운을 잡고 싶기 때문이고, 그 반대라면 다음번엔 더 유연히 대처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모든 일이 발생하게 된 필연의 경위를 좇는 피곤함을 기꺼이 떠안게 됐다. 그럴수록 전체 사건의 인과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습관적으로 하는 후회의 원천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떠밀리듯 살아간다고 자책할 때에는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내 인생의 주체가 된 느낌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마음속에 늘 불편하게 자리하던 퀘스천 마크를 하나둘씩 지울 수 있어졌다.

다 타고 재가 될 정도로 감정적으로 소진되는 경험을 했고, 그 후 한동안 깊이 우울했다. 운이 좋게도 잘 빠져나왔고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져 간다. 회복하는 탄성이 생기면서 다시 또 뭔가에 치열해지고 싶다.

난 내가 뭘 열심히 하는 게 참 좋다. 뭘 하든 진심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