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서 황혼까지

2021-05-27

개는 노견이 되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혀를 내밀게 된다. 새벽이 역시 입을 못 다문 채 항상 혀를 내밀고 있고, 이것 땜에 구강이 건조해서 그런가 물을 참 많이 마신다. 특히나 혀가 6시 방향이 아닌 8시 방향으로 나와서 그 각도로만 혀를 쓰기 때문에 물을 마셨다 하면 주변이 수영장이 되어버린다. 그뿐인가 조금만 방심하면 숨을 안 쉬고 발작을 하는가 하면, 밥은 또 왜 이렇게 안 먹는지 쫓아다니면서 먹여주고 뱉으면 또 주워 멕이고.. 말 좀 들어라!!!

앗 이거 쓰는데 방금 새벽이가 콧물 흘리면서 내 종아리에 코 갖다 댔다 T.T 진짜 불쌍하고 귀엽고 불쌍하고 귀엽고의 무한 반복이야. 콧물도 스스로 못 핥아서 내가 다 닦아줘야 하는 구염둥이 할미 새벽.

엄마는 요즘 주식 공부하는 걸 나한테 1부터 10까지 다 말해야 직성이 풀리시는지 나는 관심도 없는 분야를 아주 열심히 설명하시고 혹여라도 내가 대충 듣는 게 느껴지면 속상해하신다. 방에서 공부하다가도 나가서 말씀을 들어 드리거나 유투브가 안 된다고 할 때마다 앱을 새로고쳐 다시 틀어드리곤 한다.

눈치가 빤하고 비상할 만치 이해가 깊어 현명했던 당신이 어느덧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지도 모른 채, 유치원에서 본 개미집에 대해 신나서 제 할 말만 하는 아기처럼 행동하신다. 이런 게 나이 듦이겠지. 내가 새벽이 콧물 진물 닦아주고 밥 멕여주는 마음으로 엄마는 나를 키우셨겠지, 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다 들어드린다.

잘 살고 있다

2020-10-06

취향이라는 게 공고해져 가는 게 좋기도 하면서 동시에 괴롭기도 하다. 설렁설렁 아무거나 좋아하며 살면 맘이 더 편할까? 취향이 생기는 게 괴로운 이유는 1. 향유하기 위한 소비가 뒤따르기 때문이고 2. 취향이 찰떡같이 일치하는 상황보다 그 반대 상황이 언제나 더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경계가 또렷해지고 그 옛날 내가 느꼈던 감정의 정체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부끄러움과 치욕의 차이라든가 절망과 분노의 미묘한 다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도 왜 좋은지 모르면서 그냥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과할 정도로 내 감정을 분석하고 파악하고자 하는 경향이 생겼다. 긍정적인 경험을 했다면 또다시 느끼는 행운을 잡고 싶기 때문이고, 그 반대라면 다음번엔 더 유연히 대처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모든 일이 발생하게 된 필연의 경위를 좇는 피곤함을 기꺼이 떠안게 됐다. 그럴수록 전체 사건의 인과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습관적으로 하는 후회의 원천을 찾을 수 있었다. 너무 떠밀리듯 살아간다고 자책할 때에는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내 인생의 주체가 된 느낌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마음속에 늘 불편하게 자리하던 퀘스천 마크를 하나둘씩 지울 수 있어졌다.

다 타고 재가 될 정도로 감정적으로 소진되는 경험을 했고, 그 후 한동안 깊이 우울했다. 운이 좋게도 잘 빠져나왔고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져 간다. 회복하는 탄성이 생기면서 다시 또 뭔가에 치열해지고 싶다.

난 내가 뭘 열심히 하는 게 참 좋다. 뭘 하든 진심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짬짜면형 인간의 적당함 타령

2020-07-25

왠지 기록 중독에 걸린 것 같다. 나노 단위의 사유조차 남기지 않으면 날아갈까 안절부절.. 뭐지 결국 남기는 건 이런 것들뿐인데. 안 쓰느니만 못한데도 계속 쓰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뭔가를 잘 하려고 애쓰면 언제나 빠른 시일 내에 질리고 + 결국 잘하지 못하는 게 싫고 두려워져서 외면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잘 하려는 욕심이 들기 전에 빠르게 못해버려야 해. 그렇다고 너무 망쳐버리면 가냘픈 의욕마저 실종되어 버리므로 적당한 수준만큼만 못해야 한다. 정제된 글을 향한 욕심을 버리고 이런 어중간한 수준의 정크를 양산해야 계속 쓸 수 있다는 말씀.

이게 비단 글뿐만이 아니고 크게 내 인생을 관통하는 어떤 균형의 법칙 같다. 적당한 망함과 비루함이 있어야 내가 가진 발군의 역량이 비로소 극대화될 수 있었던.. 확실히 잘한다 잘한다 해주면 더 잘하는 인간이기는 한데, 그렇게 '잘난 아무개'라는 막이 형성되어 버리면 그 레이어가 손상되지 않도록 지키는 에너지가 추가로 요구되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 무게를 잘 견디지 못했다. 스스로의 자격을 의심하며 차곡히 적립한 불안이 결정적인 순간에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게 내 패턴이었다고. 연애든 일이든 공부든 간에.

그래서 의식적으로 나의 허접함을 표출하며 스스로를 비난해야 직성이 풀리는 마조히즘적 성향이 생겨버린 듯하다. 적당히 비루한 유머로 희석되지 않은 고농축 진지 글(feat. 엄홍식)을 볼때면 광기 어린 조롱을 날리는 못된 새디즘도 포함하여..

김연수는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나 더 강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 글쓰기'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다. 한편 신형철은 '자신의 처절한 오류와 과오를 깨닫는 회한의 순간에서 자신이 좋지 않은 사람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일보 전진할 수 있다'라고 했지 않나. 부정 편향 비판이 아니다 이건가. 하긴 비판과 비난은 다르지..

아 몰라 내가 원하는 건 적절한 성공과 잘남에 양념처럼 곁들인 '인간적 비루함'인데 지금은 완전 정반대 리버스라서 '총체적 비루함'에 '성공에의 열망'만 한 꼬집 뿌려진 상태에 가깝고. 그냥 너무 진지해지지 말고,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한없이 가볍게 조롱하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적당하게, 살아내 보려고 한다.

T.T

2020-07-21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11살, 만으로 9살. 나는 학교 복도에서 유치한 장난을 치는 애새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랜 수행 끝 달관한 고승처럼 '더 이상 나는 정신적으로 성장할 데가 없는 경지에 다다랐다=다 컸다'라고 혼자 깨달아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는 이 감정을 오래 잊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 아닌 다짐을 했었는데.

그래선지 이맘때의 다른 모든 사건들은 흐릿한 반면 이 순간의 생경함만이 아직도 선명하다. 갑자기 세상 모든 게 명료하고 우스워지며 한데 엉켜 뛰어노는 아이들의 동세가 슬로모션으로 보이던, 그 찰나의 깨달음. 대충 사회과학적 지식이야 살면서 더 쌓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이해하는 정도는 지금이나 성인이 된 후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물론 그 후로 인생의 빅 깨달음을 새롭게 얻을 때마다 11살의 나를 재소환하며 그때의 셀프 해탈이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조숙했던 어린이의 치기였으리라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순간의 감정만은 선연하게 남았고, 그 후로 20여 년을 더 살면서 다시는 비슷한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 * *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너무나도 다른 인격체 같다. 초4.. 아무리 득도해봤자 학교 화장실에서 똥 싼 걸 들키는 게 세상 최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던 때가 아닌가? 31살의 나는 아직도 똥 얘기나 하면서 더 큰 정신적 성장을 꿈꾸는데 말이야. 아무튼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왕따 문제나 학업 관련이 아닌 '어른의 세계로 입문한 내가 어린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다 까먹어버리면 어떡하지'라는 다소 재수 없는 실존적 의문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 나는 싫은 걸 싫다, 좋은 걸 좋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게 어려웠다. 정확히는 뭘 정말로 좋아하는지 감이 안 왔다. 또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유해도 되는 건지,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부해도 되는 건지 가치 판단이 잘 안 섰다. 눈치를 많이 보고 남을 배려하는 성향 탓도 있을 거다. 안타깝게도 내 부모는 숨겨진 나의 의사를 정확하게 캐치한 적이 드물었고 때문에 은근히 서운하거나, 서운함을 넘어 한이 되어버린 순간도 존재한다. (지금 와서 엄마와 그때 얘기를 하면, 반대로 엄마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서 속 터질 때가 많았다고)

"너는 진짜 그런 게 좋냐?" "너는 그런 게 정말 맛이 있냐?" 이게 아빠의 디폴트 말투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진짜 어른이 되면 어릴 때의 감성을 이해할 수조차 없게 다 까먹나 보다' 하고 '개인의 몰이해'를 '세대 간의 격차'로 오독해 버렸다. 동시에 '어른이 되어도 나는 잊지 말아야지. 언제나 똑같이 기억하고 이해해야지. 절대 동떨어진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굳게 다짐하기도 하면서.

* * *

다시 초4의 고민으로 돌아가서. 이런 고민을 위해 딱히 내가 노력한 건 없다. 쓸데없이 기억력이 비상하던 그때는 미래의 내가 대부분의 경험을 통째로 망각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을뿐더러, 늙음에 대한 자각도 없었으니까. 올림피아드, 경시대회, 내신과 수행, 외고 입시, 재수 삼수, 그리고 대입까지 그저 잘 짜인 하나의 인생 각본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청소년기 뺑이를 치는 동안 이런 고민은 저기 저 추억 상자 속 이야깃거리 1로 변모했고, 그러는 사이에 동심을 간직하기엔 이미 글러버린, 머릿속에 있는 거라곤 유흥과 물질, 연애 수치의 역사밖에 안 남은 다소 한심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어느덧 장황해진 이 이야기의 요는, 내가 근래 초딩들의 성지이자 최고의 오락거리라는 틱톡을 다운받았고, 호기심에 시작한 이 어플이 어느새 초강력 길티 플레저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으며, 초딩 혹은 유사초딩들의 댓글을 읽고 있노라면 아주 별천지 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다. 개인적 감상을 남긴 댓글이 반말이라 심기가 상했는지 "죄송한데 은반하지 말아주세여ㅠㅠ"라는 십 대 크리에이터의 대댓글을 보고 쓰는 글 맞다.

이 친구들을 나는 어느 선까지 이해하고 있을까. 말 그대로 별걸 다 줄이는 세상에서 아직도 사전적 어휘의 적확한 사용이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주창하는 나는.. 훗날 그들에게 나의 글은 트위터 맥락망 중장년의 뜬금없는 정치 공격처럼 느껴지진 않을까?

롬곡옾눞이다 증말

궁금한 게 있는데

2020-06-05

다들 자기혐오의 수준이 심해질 때 어떻게 하시나요. 나의 오랜 병폐. 고질적인 이 해로운 감정이 언제쯤 건강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보통은 부정적인 감정을 잊기 위해 잡박하기 그지없는 자극을 찾곤 하죠. 빠르게 리젠되는 커뮤니티 글을 훑거나 140자 단위로 주제가 휙휙 바뀌는 트위터, 또는 인스타, 또는 궁금하지도 않은 요상하고 추접스러운 영상을 찾아보며 유튜브 알고리즘을 혼란케 하는 일들.. 이것도 아니면 불안을 글로 남기기도 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자극성 도피는 무엇이 정말로 문제인지를 늘 잊게 만들어요. 내 문제를 각 잡고 마주하기 전에 세상의 흉흉함에 치를 떨어버리거나(트위터) 바보 천치 같은 인류를 보며 인류애를 깎아먹거나(페이스북) 예쁘고 귀엽고 옷 잘 입고 잘생겨서 팔로했더니 '그 사람'은 없고 자본주의 마케팅의 헛헛함만이 남는 식이죠.(인스타)

자리에 누워서 내 잘못들을 나열합니다. 도통 나아지지 않는 어떤 현상들에 의문을 갖기도 하면서요. 가끔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 이게 이미 다 짜인 판이 아닌가, 나는 이미 망해버린 패처럼 저기 저 부루마블 무인도에 갇혀서 주사위의 더블만 기다리는 게 아닐는지 하는 상상도 합니다. 엄마의 슬픔, 아빠의 고됨, 형제의 철없음을 떠올리고 한숨도 쉬고요. 나만 좋아해 주는 아픈 반려견도 쓰다듬어 보고요. 인간은 도대체가 뭔지, 이 끝없는 의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내 모든 불행이 결국 내가 믿음이 없어서 생긴 게 아닐까, 오늘 아침에 읽은 인류 기원과 초고대문명에 대한 글도 떠올려보고요. 차라리 내가 뭔가를 쉽게 믿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미스터리 공포 무당 영혼 이런 거 나 되게 좋아하거든요. 차라리 비루한 내 일상마저도 사실은 신의 계획대로 흐르는 거였으면 싶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아마도 또렷하고 구체적인 삶의 방향과 의미가 없기 때문이겠죠.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했던 말도 기억나네요. 내가 정확히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나는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데요, 요즘 내 나이를 직시하면서부터는 결혼 비혼 뭐 이런 것보다 출산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나한테서 내가 꿈꾸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 출산과 육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어쩌면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건 아닐까요.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분명 있을 건데, 다들 그렇게 말했는데, 나도 한때는 엄마나 아빠의 '우주'였는데. 삶은 사실 거창하지 않거든요. 딱히 숭고하거나 거룩하지도 않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에 꽂힌 듯이 엄마가 되고 싶은 거예요. 아이가 내 자아를 확충해주리라 믿으면서요.

그냥 조금만 더 나은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문제와 문제의 해답과 지금 당장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사실은 다 알고 있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장 쓰던 글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아서요.

끝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용기입니다. 모두들 용기를 빕니다. 평안하세요.

실시간 업데이트 일기

2020-05-29

일기를 쓰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제목에 날짜만 들어가는 게 싫다. 특정 글을 다시 읽기 위해 모든 날짜를 다 클릭해 봐야 하므로.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주제를 정해 글을 쓰는 편인데 지금 당장은 한 주제를 깊게 얘기하고 싶지가 않다. 사실 시간에 매우 쫓기고 있다. 논문 초고의 마감이 31이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썼냐고? 글쎄 5프로..? 나의 미루기는 이제 습관이 아니고 병에 가깝다. 내 인생이 분명 이것으로 병들고 있다. 나의 미룸 리스트를 떠올릴 때마다 숨이 차오르고 식은땀이 나는데 이런 걸 공황이라고 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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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귀귀를 팔로하고 있었다. 이웃 업데이트에 귀귀가 뜨길래 들어가서 본 만화는 옛날처럼 유쾌하지가 않고 기분이 더러웠다. 스스로의 안목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다. 내가 좋아한 작가나 감독은 어쩐지 상당수가 여혐 논란이 있었고, 예술계의 플로우상(비단 예술계뿐만이겠냐만) 여성혐오 베이스가 만연했다지만서도 어쩔 수 없는 자괴감이 든다. 과거의 내가 죄의식 없이 즐길 수 있던 컨텐츠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건, 세상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개인의 안목도 올바르게 성장한다는 거겠지. 우디앨런의 영화를 더 이상은 즐길 수도 없고 훌륭하다 여기던 숱한 작품들을 더는 좋다 말하기 힘들어지는 게, 좋은 걸 좋다 말하기 전에 그로 인해 지워질 약자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떠올리는 게 피씨의 길- 이라고 아직도 현진건 문체 못 잃는 디두가 말하네, 아아 그립은 흘긴 눈으로 귀귀를 언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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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아저씨네 가게에 수육을 삶아놔서 그거 먹고 오겠다고 신이 나서 새 옷 빼입고 나간 아부지가 술이 떡이 돼서 들어와서는 샤워하다 넘어지셨다. 그것도 제대로. 팔꿈치가 찢어지고 골반에 심한 멍이 들고 허리를 잘 못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숨을 잘 못 쉬겠단다. 이걸 어쩐다. 이사 오기 전 집에서 만취상태로 나를 보겠다며 다락방에 오르다 계단에 긁힌 정강이가 심하게 덧이 나 2주 동안 통원치료한 것도 채 낫기 전이다.(랩으로 둘둘 감고 샤워함) 계속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일단 방에 들어와서 논문을 쓰려는데 당연히 집중이 될 리가 없다. 왠지 가까운 미래가 더 암담해졌다. 문밖에선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는지 참았다가 내일 아침에 병원 갈지를 놓고 다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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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아빠가 꼭 가서 등록해놓은 당신 지문으로 창고 문을 열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놈의 지문 인식 때문에 대타가 불가하지만 이 시국에 이 정도면 좋은 조건이라고 버릇처럼 말하던 그 일. 하루라도 늦었다간 얄짤없이 짤린다고 걱정을 하던 일인데. 아빠의 찢어진 팔꿈치를 드레싱해주고 젖은 머리를 말려주고 티셔츠를 혼자 못 입길래 겨우 입혀주고 눕혀주고 오전 5시 알람까지 설정해주고 나오는 길에 문득 스치는 '아빠 짤리면 어떡하지' 생각. 그리고 연이어 '아빠 이렇게 늙어 꼼짝 못 하고 온갖 병환에 그 수발 다 내가 들면 어떡하지' 생각. 참 이 정도 인간이다 내가. 온 집안 퍼지는 한숨소리가 매섭다.

봄날은 간다

2020-05-28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늘 우리 곁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다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추출해낸 기억의 일부가, 지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다.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를 처음 본 2012년, 대학교 2학년, 연애 사랑 인간관 모두 풋내나던 그 시절. 영화를 보고 분명 무언가가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는데 표현할 길이 없었던 당시의 내가 다른 이의 리뷰를 읽고 읽고 또 읽다가 제일 마음에 드는 구절이라 적어놓았던 문장. 그걸 다이어리에서 찾았다.

당시 몰두하던 연애를 어설프게 망쳐버린 뒤, 다친 마음이 회복이 안 되고 관계를 쌓는 게 어렵게만 느껴져 홀로 영화만 주구장창 보던 때였는데. 그때 적어놓았던 전투적인 고뇌가 지금 보니 어설프고 서툴고. 스스로 아프지 않으려 방어전을 펼치며 애를 쓴 게 적나라하게 보여서. 허 참 허 참~~ 나의 회피형 히스토리의 기원이 되시겠다? 허참~

바보같게도 이때를 계기로 나는 다시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몰빵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고, 관계가 귀찮고 어렵고 피하고 싶어질 때 정면으로 대응하며 돌파하지 못했고, 언제나 한쪽 발을 뺄 준비를 한 채 무언가를 시작하곤 했다.

하나의 정해진 답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의 어려움과, 파악할 길 없는 상대의 속마음 같은 것들. 너가 어려서 그렇다, 초짜라 그렇다, 더 좋아하면 관계 속 주도권을 잃는다는 류의 말들. 그렇게 영화 속 상우에게 이입되던 내가 어느덧 은수에 이입되는 때가 와버린 것 같은데.

모와의 어쩌면 진짜 마지막이 될 대화에서 나는, 우리가 함께한 기억 일부가 훗날 네가 살아가며 마주칠 힘든 날들 속에 작은 등불처럼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뭐 우리 관계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고. 그저 한때는 너도 꽤 사랑받았고, 또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정도로. 그거면 됐다고.

나도 모르게 염병할 영화 리뷰 같은 소리를 하구 끝을 내버렸네.

헤어진 애인 걱정하는 거 그래 그거 세상 쓸데없는 거 나도 아는데. 그래도 나는 쓰잘데없이 섬세해가지구 말이야 8년 전 그때 생긴 스크래치를 오늘에 와서야 보듬고 받아들이고 있잖아.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너가 다음 관계를 용기 있게 잘 시작하길 바란다.

받아들이는 것

2020-05-25

끔찍하지만 결국엔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고 받아들이는 것. 지난 연애를 복기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 하루를 마감하기 전, 스스로의 무능과 무력함에 치를 떠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소한 무언가를 바꿔가려고 애쓰는 것. 하찮아도, 사랑스럽지 않아도 묵묵히 지켜보는 것. 과거에서 현재로, 또 미래로 나아가는 힘 나를 받아들이는 일

언어라는 게

2020-05-05

진짜 신기하지 않아? 언어라는 게 결국 사람의 사고를 결정하는 것 아닐까? white valley girl 말투 쓰는 애들 있잖아, 어쩜 이렇게 천진하게 바보같이 맑을까 싶은 애들. 결국 다 그 말투 때문에 성격도 그렇게 된 거 아냐??

국제연애는 나를 자연스럽게 영어의 길로 인도했고 나는 정말 많은 점을 통찰하게 된 것 같아.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앞에서 내가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이 벽을 깰 수 있을 만큼 너를 사랑하는지를 한두 번이 아냐, 수천 번 수만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

어쩌면 너무나 게으른 나에게 커다란 인생 과제가 주어진 느낌이었달까.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생 공부하며 사는 삶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게 뭐 나쁜가. 그게 바로 소명이란 거일 수도 있겠다.

아직도 몇몇 단어들은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편하게 먼저 튀어나오는 나를 보면서 오빠는 지랄하지 말라고ㅋㅋ 욕하지만 나는 또 그거 보면서 인간의 학습능력에 대해 놀라기도 해. 익숙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익숙함이 다른 무언가로 다시 채워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뭐 이런 생각들이 드네. 아무튼 결론은 언어는 놀랍고 그냥 가끔은 이 지구에 이렇게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게 경이롭고 그래... 하나쯤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게 인간 삶에는 필요하다고 느껴. 근데 나 말고 내 동생이나 자식이 있다면 걔들한테 종용할 거 같아. 배우고 익히라고. 왜냐면 나는 지쳤고 게으르니까^_ㅜ 이래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자기욕망을 투영한다는 말이 나오나 보다. 부모들은 나처럼 다 힘이 한풀 꺾였나 보아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

2016-03-28

숨만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슬프지만 내게는 너무 자주 있는 일이다 지금도 나는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아서 여섯시간 정도를 자다깨다폰을보다멍을때리다 흘려보냈다 지금 나는 마침표를 찍고 싶지도 않다 신기하게 무언가를 먹는 것은 귀찮지가 않아서 두 끼니나 잘 챙겨먹었다 나는 뭘까 먹고 자고 똥싸고 공기를 축내려고 태어난 것 같다 하지만 나 하나 정도 공기를 축내고 물을 오염시키고 식량을 축내더라도 지구는 잘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방만한 생각이 든다 사실 맞지 어느 순간 나 라는 존재 자체가 전부 사라져도 이 세계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가끔은 그 사실에 너무나 안도감이 든다 내가 먼지같은 인간인 것은 종종 나에게 슬픔을 주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는둥 마는둥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면죄부 같은 것이다 다만 일말의 책임을 나누어야 할 존재가 나에게 생긴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 그 존재는 현재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이다 다행히도 아직 세 개의 그룹에 한하는 이 존재들은 살아가면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부부와 자식 등의 혈연으로 이 존재의 그룹이 커져갈수록 난 함부로 사라지고 싶다,없어져도 된다-이런 말들을 할 수 없어지려나 모르겠다 이정도의 복잡한 생각 역시 지금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 이야기

2015-08-19

1.

잠이 오지 않는다. 밀린 웹툰도 보고 트위터도 읽고 잘 확인하지 않는 인스타그램까지 다 훑으며 나는 왠지 꼬박 깨어 있었다. 제대로 잠에 취하지 않았을 때의 증상을 안다. 일단 몸이 저릿저릿하다. 자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무색하게 뚜렷이 깨어있는 뇌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알이 뻐근하다. 그래도 고집스레 스마트폰을 쥐고 아무 웹툰이나 정주행을 하다보면 난 이내 잠이 들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글렀다. 이상하다.

2.

오랜만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글을 쓴다. 참 오래도록 글 쓰기를 하지 않았다. 지난 학기 문화예술학입문 수업에서 답사 후기 따위를 적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려나. 보고용 글을 제외하고 텀블러나 블로그, 카페 등에 글을 남긴지는 일년도 더 지났다. 내 글쓰기는 확실히 퇴화했다. 증거는 확실하다. 지금처럼 번호를 임의로 나누고, 문단을 구분하지 않으면 난 긴 글을 쓰지 못한다.

3.

인간의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의 회백질에는 ‘맥락틈새’라는 아주 미세한 사이공간이 있는데, 바로 이 공간의 개폐여부가 한 인간의 문장력을 결정짓는다고 한다. 즉, 문단과 문단을 매끈하게 연결하는 능력이 고작 1.5세제곱센티미터의 부피를 가진 해마 속 미세한 공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18세기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두개골을 쪼개어 맥락틈새 개통술을 받음으로써 정치, 외교권의 선구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해마의 기능이 망가지며 발생하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나 간질은, 사실 맥락틈새가 닫히는 비극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장을 허물없이 구사함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거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혀끝에서 맴도는 것,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이 자연스런 현상이 곧 맥락틈새가 닫혀버렸다는 표식이자, 해마 기능 장애의 완벽한 초기증상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글쓰기 퇴화는 아마 이 고약한 틈새가 서서히 닫히고 있다는 확실한 증표가 아닐까.

4.

사실 3번 문단은 전부 내가 지어낸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거짓 보다는 차라리 구라에 가깝다. 구---라. 저런 구라를 능청맞게 써내려간 까닭은 요즘 읽고 있는 소설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김언수 작가의 <캐비닛>에서는 이런 구라가 적어도 100가지는 넘게 나온다구. 알면서 속아주는 기분이 이토록 괜찮은 건 드문 일이다.

5.

잠이 오지 않아서 양을 세려다가, 영어권 국가에서 양(Sheep)의 발음이 잠(Sleep)과 비슷한 데서 오는 유사효과이기 때문에 한글로 양을 세는 것은 부질없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우리말로는 ‘잠자리’를 세는 게 훨씬 효과가 있다나? 그래, 한 번 세어나 보자, 잠자리 한 마리, 잠자리 두 마리, 잠자리 세 마리..

그런데 말이다. 잠자리는 모기의 완벽한 천적으로, 유충일 때는 모기 유충인 장구벌레를 3,000마리 정도 잡아 먹고 성충이 되면 모기를 한 마리당 1,200~2,000마리 씩 잡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잠자리의 날개를 인간의 손가락으로 잡으면 그 온도를 못이겨 날개가 녹아버린단다. 때문에 모기가 싫은 당신이라면 적어도 잠자리의 날개를 두 손가락으로 쥐는 무식한 짓은 하면 안 된다는 말씀.

6.

아까 3번 문단에서 속은 여러분은 방금 이 말도 구라가 아닐까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거짓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 여부는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건 내가 즐겨보는 김양수 작가의 웹툰 <생활의 참견>의 지난 주 베스트댓글에 적힌 내용이었으니까.

7.

잠이 안 와서 잠자리를 세던 나는 결국 매일 밤 잠을 청하기 위해 보던 웹툰의 베댓으로 회귀하며 더욱 더 똘망똘망한 정신을 갖게 되었고, 이 사실이 문득 우스워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주의 베댓을 기억하는 내가 살짝 대견하기도 했다. 참 쓸데없는 글인 것 같지만, 맥락틈새가 거의 닫혀버린 26세의 이지수가 쓰기엔 이정도도 아주 우수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랜만의 글쓰기, 끝!